JESUS CHRIST IN LEVITICUS

레위기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림자에서 실체로, 평신도를 위한 레위기 강해 · 김동석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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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IN LEVITICUS

레위기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림자에서 실체로, 평신도를 위한 레위기 강해

김동석 지음

레위기의 낯선 길을 함께 걸어 준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 모든 그림자 너머에서

나를 먼저 만나 주신 진리 되신 그분께 이 책을 바칩니다.

여는 글

레위기를 펴 놓고 막막했던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피와 제물과 낯선 규례들. 성경 통독은 늘 이 책 어디쯤에서 멈추곤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를 통해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새로운 시각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제단 위에서 타오르는 제물도, 기름 부음을 받는 제사장도, 일 년에 단 하루 열리던 휘장도,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라 했습니다(히브리서 10장 1절). 그림자가 있다는 것은, 실체가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책은 화려한 학문도, 새로운 주장도 없습니다. 다만 한 목회자가 성도들과 함께 레위기를 통과하며 만난 예수님을, 만난 그대로 적었습니다.

책은 여섯 단계로 나뉩니다.

먼저 다섯 가지 제사에서 십자가의 다섯 얼굴을 만나고(1~7장),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제사장을 만납니다(8~10장). 일상 깊이 새겨진 거룩과 부정의 구별을 지나(11~15장), 이 책의 심장인 속죄일과 피 앞에 섭니다(16~17장). 그리고 속죄받은 백성의 거룩한 삶을 배우고(18~26장), 자신을 드리는 서원으로 책을 닫습니다(27장).

부디 이 작은 책이, 오래 덮어 두었던 레위기를 다시 펴는 데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메마른 율법으로만 알았던 그 옛 제단들 너머에서, 단번에 자신을 드리신 한 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후 2026년 여름, 김동석

목차

  • 여는 글
  • 제 1 부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갈래 길
  • 제 1 장 번제(燔祭)
  • 제 2 장 소제(素祭)
  • 제 3 장 화목제(和睦祭)
  • 제 4 장 속죄제(贖罪祭)
  • 제 5 장 속건제(贖愆祭)
  • 제 6 장 제사의 규례(規例)
  • 제 7 장 화목제의 규례(和睦祭)
  • 제 2 부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시는 분
  • 제 8 장 제사장 위임식(祭司長 委任式)
  • 제 9 장 첫 봉사와 임재하신 영광(榮光)
  • 제 10 장 다른 불(異火)
  • 제 3 부 거룩과 부정 사이
  • 제 11 장 거룩을 위한 구별(區別)
  • 제 12 장 출산과 정결(淨潔)
  • 제 13 장 드러난 부정(不淨)
  • 제 14 장 회복(回復)
  • 제 15 장 유출(流出)
  • 제 4 부 휘장 안으로, 단번에
  • 제 16 장 속죄일(贖罪日)
  • 제 17 장 생명의 피(血)
  • 제 5 부 거룩하신 분과 동행하는 삶
  • 제 18 장 거룩한 경계(境界)
  • 제 19 장 거룩한 일상(日常)
  • 제 20 장 거룩의 값(代價)
  • 제 21 장 거룩한 제사장(祭司長)
  • 제 22 장 흠 없는 제물(祭物)
  • 제 23 장 여호와의 절기(節期)
  • 제 24 장 꺼지지 않는 등불(燈)
  • 제 25 장 희년(禧年)
  • 제 26 장 복과 저주(福과 詛呪)
  • 제 6 부 값을 치른 헌신
  • 제 27 장 서원(誓願)
  • 닫는 글
  • 참고 문헌

제 1 부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섯 갈래 길

레위기 1~7장

제사가 왜 다섯이나 될까요. 하나면 되지 않았을까요. 처음 레위기를 읽는 분들이라면 해보았을 법한 물음입니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다섯 제사는 십자가라는 단 하나의 사건이 가진 다섯 가지 얼굴입니다. 번제는 자신을 다 드리신 헌신을, 소제는 흠 없는 삶을, 화목제는 회복된 식탁을, 속죄제는 대신 지신 죄를, 속건제는 대신 갚으신 빚을 보여 줍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천천히, 한 장씩 음미해보세요. 일곱 장이 끝날 즈음이면 여러분이 그 동안 바라보던 십자가가 전보다 훨씬 크게 보이실 것입니다.

제 1 장

번제(燔祭)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드린 그리스도

본문 레위기 1장 1절~17절

들어가며

“주께 드리네...” 주일 예배의 찬송에서 우리는 종종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런데 막상 월요일 아침이 되면, 그 고백이 어디로 갔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다 드리겠다던 마음과, 정작 작은 것 하나 내려놓기 어려운 현실 사이의 거리가 존재하는데, 번제는 바로 그 거리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레위기는 출애굽기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출애굽기 마지막 장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위에 충만히 임했습니다(출 40:34–35). 그런데 그 영광이 어찌나 충만했던지, 모세조차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 된 백성은 그 임재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까요? 임재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성막이라면 그것은 백성들에게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창세기부터 레위기까지의 여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는 “인간의 파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출애굽기는 “인간의 속박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레위기는 “인간이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책”.

그렇다면 그 대책이 되는 레위기는 어떻게 성막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백성들 간의 간극을 메울 답을 찾아갈까요?

“바로 번제입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본문이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1:1)로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은 협박이나 강압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부르심(calling)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구속하신 백성, 이미 자기 소유로 삼으신 백성을 부르시어, 그들이 어떻게 자신과 교제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여러분은 그동안 구약의 제사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나요? 제사는 “구원받기 위한 조건”일까요? 아닙니다. 제사는 “이미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교제의 통로”입니다. 이 원리를 기억하면서 레위기를 읽는다면 우리는 레위기에 대한 오해를 벗어나 그 안에 담긴 풍성한 은혜, 즉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본문 들여다보기

이 장의 중심 말씀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레위기 1장 4절

레위기 1장은 번제의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합니다. 번제는 히브리어로 ‘올라(עֹלָה)’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올라간다(to ascend)’는 동사 어근에서 나왔습니다. ‘올라’ –‘올라간다’ 우리말과 발음이 비슷하지요. 따라서 번제는 제물을 불로 태워 그 연기가 위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제사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urnt Offering’, 곧 ‘다 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여기서 다른 제사들과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제사는 제물의 일부만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이나 예배자의 몫이 되는데,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제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사르는 유일한 제사였습니다(레 1:9). 이 ‘전부 태움’이 번제의 핵심 의미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과정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완전히 태워야’ 합니다. 곧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1장을 보면 예물의 종류에 따라 세 단락으로 구성됩니다.

소의 번제 (1:3–9).

가장 값진 제물입니다. 부유한 자가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예물은 “흠 없는 수컷”이어야 했고(1:3), 예배자는 “회막 문에서” 그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뒤(1:4) 직접 잡았습니다. 제사장들이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예배자가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면, 제사장들은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어 제단 위 불 위에 벌여 놓고 전부를 불살랐습니다.

양과 염소의 번제 (1:10–13).

평범한 이스라엘 백성의 제물입니다. 절차는 소의 경우와 거의 동일하되, 제단 북쪽에서 잡았습니다.

새의 번제 (1:14–17).

가난한 자의 제물입니다.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새끼로 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를 봅니다. 제물의 순서(소–양/염소–새)는 예배자의 재력에 따른 등급을 나타내지만,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예배자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신다는 암시는 없습니다. 가난한 자도 결코 예배에서 배제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예수님의 부모님인 마리아와 요셉은 비둘기 한 쌍으로 예수님을 위한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눅 2:24).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서 가난한 자들의 제사와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단락 모두 한 문구로 끝맺습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히브리어 ‘레아흐 니호아흐’, רֵיחַ נִיחוֹחַ).

이 표현을 하나님이 실제로 냄새를 맡고 기뻐하신다는 이교적 관념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졌다는 사실, 곧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 평온과 화평이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고전적 표현입니다.

안수(סָמַךְ, 사마크).

예배자는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어야 했습니다(1:4). 오늘날에도 안수를 합니다. 축복기도를 받거나, 임직을 받을 때 행해집니다. 보통은 안수할 때 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수하다 라는 동사는 단순히 손을 가볍게 대는 것이 아니라 “지긋이 누르다, ~에 의지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손을 머리에 얹는 것이 아니라 지긋이 누르는 동장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제사에서 행해지는 안수는 오늘날의 안수와 차이가 있고 또 번제와 속죄제의 안수도 구별됩니다. 번제의 안수와 속죄제의 안수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살펴보면, 번제에서의 안수는 예배자와 제물의 동일시(identification), 곧 “이 제물이 곧 나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반면 속죄제에서의 안수는 죄의 전가(transfer of guilt)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즉 번제에서의 안수는 예배자가 자기 자신을 제물과 하나로 묶어 통째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헌신의 표현을 담은 것입니다. 이 부분은 뒤에서 살펴볼 번제에 담긴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로서의 속죄 (כָּפַר, 카파르)

본문은 안수한 번제물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1:4).

번제 역시 속죄의 효력을 지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는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다른 존재가 대신 받는다”는 믿음으로 손을 얹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번제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 받으심이 되는 흠 없는 제물을, 예배자가 자신과 동일시하여 통째로 드림으로, 예배자가 하나님께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그분과 화평을 누리는 제사입니다.

핵심 요약

번제는 ‘올라’라는 이름 그대로, 가죽 외의 전부가 불 속에서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유일한 제사였습니다. 소든 양이든 새든 형편대로 드릴 수 있어 누구에게나 길이 열려 있었고, 예물은 흠 없어야 했으며, 예배자는 안수로 ‘이 제물이 곧 나입니다’ 고백하며 자원하여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려진 제물은 향기로운 냄새로 받아들여져 예배자를 위한 속죄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제 이 구약의 규례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번제는 “죄를 담당하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를 비춥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흔히 “죄 문제가 해결되고 사탄이 패배한 곳”, 곧 죄인의 필요가 충족된 장소로만 국한하여 바라봅니다. 물론 그것은 영원히 참되고 찬송받을 진리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또 다른 차원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매킨토시(C. H. Mackintosh)의 말을 잠시 보겠습니다.

번제는 십자가상에서 죄를 담당하시는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시는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C. H. 매킨토시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두 가지 면에서 바라보셨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를 죄를 담당하는 자리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죄 없는 분께서 죄와 접촉한다는 것, 그리고 잠시일지라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그 얼굴빛을 잃는다는 것. 아버지와 완전한 하나 됨 속에 계셨던 예수님께 이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는 또 다른 면이 있습니다.

둘째로 십자가는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순종의 완전한 표현이 고백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번제는 첫째와 둘째 중 어느 십자가에 해당할까요? 놀랍게도 두 번째 십자가입니다. 주목할 부분은 레위기 1장 3절에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열납되도록)” 이라는 표현입니다. 만일 십자가가 단지 진노를 감당하는 자리일 뿐이라면 “열납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즉 번제가 예표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그리스도의 변함없는 헌신과 순종이 드러난 십자가 사역입니다.

다음으로, 흠 없는 수컷은 무흠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제물은 반드시 “흠 없는(תָּמִים, ‘타밈’)” 것이어야 했습니다(1:3, 10). 이 단어는 ‘완전하다, 온전하다’는 동사에서 나왔으며, 70인역은 이를 헬라어 ‘아모모스(ἄμωμος, 흠 없는)’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바로 이 단어를 그리스도께 그대로 적용합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1장 19절

구약의 제사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제물들은 모두가 흠 없어야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장차 오실 흠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을 미리 가리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셨던 그리스도만이(고후 5:21) 하나님께 온전히 받으심이 되는 참 번제물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번제는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로서 그리스도의 자발적 헌신을 예표합니다.

본문의 “기쁘게 받으시도록”(1:3)을 옛 영어 번역들은 ‘of his own free will(자원하여)’로 옮겼습니다. 번제는 강압이나 의무로 드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번제는 본질적으로 자원제(自願祭)였습니다. 그렇다면 번제가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떤 모습인가요? 바로 주님께서 자원하여 담당하신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장 위대하고 빛나는 모습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하는 자로서 강제성을 띄고 부득이하게 죽으셔야만 했다면, 그분의 죽음에 ‘자발성’이 사라진 ‘타성’에 의한 십자가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억울하게 비자발적으로 죽임 당하신 어린양 예수를 묵상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강제로 죽여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에게는 그런 하나님을 공포 속에 섬겨야 했을 것입니다. 독생자를 죽이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렇게 구원의 길을 열었는데도 우리 같이 수시로 어긋난 길을 갈 때 그 진노를 퍼붓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번제 특유의 아름다움인 ‘자원제’의 모습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요한복음 10장 18절

사람도 천사도 마귀도, 그 누구도 그분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은 자신 스스로만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실 수 있습니다. 번제가 자원제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자발적 헌신을 예표한 것으로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는 드리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드려지는 제물이십니다.

구약의 번제에서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장과 바쳐지는 제물이 당연히 구분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둘이 하나가 됩니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제사장이자, 동시에 드려지는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9장 14절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흠 없는 제물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대제사장 또한 흠이 없어야 했습니다. 흠 없는 제물을 준비했다 하더라도, 그 제물에 안수하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은 인간이며, 그는 여전히 흠이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는 불완전했고 반복되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흠 없는 제물과 흠 없는 제사장이 드리는 완전한 제사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 둘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제물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죄 사함의 제사를 단번에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께 올라간 향기로운 냄새였습니다.

앞서 본 ‘향기로운 냄새’를 70인역은 ‘오스메 유오디아스(ὀσμὴ εὐωδίας, 향기로운 냄새)’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바로 이 표현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장 2절

그리스도의 자기 헌신은 아버지께 올라간 참 번제의 향기였습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어오른 그 향기는, 구약의 모든 시대에 걸쳐 모든 번제가 거듭 보여 주었던 그 향기의 실체였습니다.

끝으로, 번제의 안수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을 보여 줍니다.

번제에서의 안수란 예배자와 제물이 동일시되는 과정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흠 없는 제물을 번제물로 드렸다면, 그 번제물에 안수한 사람은 흠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흠 없는 자로 받아들여집니다.

하나님께서 번제물을 용납하셨다면, 거기에 안수한 자도 용납됩니다. 즉 예배자와 제물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흠 없는 제물을 통해서 우리를 보십니다.

흠 없으신 그분을 하나님께서 받으셨기에, 그분 안에 있는 우리도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번제는 바로 이 놀라운 교환을 미리 그려 보인 것입니다.

핵심 요약

번제가 그린 참 제물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흠 없는 수컷은 죄 없으신 그분을, 자원하는 드림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사랑을, 전부 불사름은 남김없이 자신을 내어 주신 십자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믿음의 안수로 그분과 연합하여, 그분의 온전한 드리심이 곧 나의 받으심이 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삶으로 이어지며

번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단번에 완성되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더 이상 드릴 제물이 없는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은 우리에게 새로운 번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짐승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첫째,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

바울은 의도적으로 제사 언어를 사용합니다. 옛 번제가 죽은 짐승을 통째로 태워 드린 것이라면, 우리의 번제는 ‘산 제물’, 곧 살아서 날마다 드리는 헌신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산 제물은 ‘끊임없이 다 타버리되 결코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어느 한 순간의 열정과 감격으로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매일 삶의 제단 위에 자신을 다시 올려놓는 헌신으로 고백 됩니다. 또한 이 헌신은 자발적이며 기쁨이며 향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합시다. 번제가 가르치는 헌신은 ‘무엇을 얼마나 드리느냐’를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드리느냐’의 문제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주일에 “내 삶을 다 드립니다” 찬양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사람이, 월요일 아침 시작 되는 삶의 터전에서 그 마음을 잊어버린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장 만나게 될 손해보고 자존심 상하고 억울한 일 앞에 누구 보다 핏대를 세우고 분노를 퍼붓는 일이 반복한다면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오롯이 십자가 앞에 내려 놓지 못한 삶을 반복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를 내려놓기를 매일 반복하며 끊임없이 다 타버리되 소멸되지 않는 더욱 성화를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 보다 앞서 가시어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셨고, 우리는 그 피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 은혜를 날마다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드려진 사랑과 순종을 회복하는 예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는 자칫 “내가 무엇을 받았는가”에만 머물기 쉽습니다. 용서받았고, 평안을 얻었고, 복을 누린다는 것은 모두 참된 은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평가하실 수 있는 깊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님의 보혈로써 죄인의 구속에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었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더 깊은 부분은 예수님의 자발적 순종이 아버지를 향해 드려진 완전한 사랑의 고백이라는 부분입니다.

성숙한 예배자는 놋 제단(속죄)에 서서 죄 사함의 평안을 누리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넘어, 그분이 아버지께 얼마나 아름다운 향기였는가를 보고 경배하는 예배로 나갑니다. 우리는 보다 더 성숙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이 “내 필요”를 진열 하고 감격과 은혜를 받고 누리는 진열장에 머물러 선 안되며,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완전한 사랑과 순종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경배와 감사로 나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번제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이루게 됩니다.

즉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들여다보세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온통 “주세요”의 목록뿐이라면, 우리는 아직 놋 제단 앞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께 얼마나 아름다우셨는지’떠올리는 기도를 드려 보세요. 받은 것을 세는 예배에서, 드리신 분을 경배하는 예배로 한 발 더 깊이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셋째, 죽기까지 순종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번제는 곧 자기 목숨을 죽음에까지 내어드린 그리스도의 헌신을 나타냅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만, 살아가며 드리는 헌신이 소제(레 2장)라면, 죽음에까지 자신을 내어드리는 헌신이 번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성화 또한 이 두 가지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날마다 순결하게 살아내는 헌신(소제)과 더불어,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헌신(번제)입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은 생각보다 가까이, 그리고 자주 찾아옵니다. 오랜 다툼 끝에 먼저 사과의 문자를 보내야 할 때, 내가 한 일의 공을 후배에게 돌려주어야 할 때, 손해를 보면서도 한번 한 약속을 지켜야 할 때, 그 작은 자기 부인 하나하나가 바로 오늘 내가 드리는 번제입니다.

닫는 묵상

번제(올라)는 ‘올라가는’ 제사였습니다. 연기가 위로 올라가듯, 그리스도의 완전한 헌신은 아버지께 향기로 올라갔고, 그 안에 연합된 우리의 삶도 이제 날마다 위로 올라가는 향기가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우리가 드릴 제물은 더 이상 짐승이 아닙니다. 그분이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릴 것은 오직 우리 자신입니다. 흠 없으신 그분께 안수하여 그분과 하나 되어, 그분의 받으심 안에서 함께 받으심이 되는, 산 제물로서의 삶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장 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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